1909년신흘의 10대손 신돈식(申敦植)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유도헌(柳道獻)·김도화(金道和)의 서문과 권말에 이중명(李重明)·이만계(李晩煃)의발문 및 신돈식의 후지(後識)가 있다.
2권 1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부(賦) 5편, 시 10수, 소(疏) 2편, 서(書) 3편, 제문 1편, 잡저 5편, 권2에 부록으로 행장·묘갈명·묘지·묘표 각 1편, 제문 3편, 만사 15편이 수록되어있다.
서 가운데 「여도내의장김한림해유정자종개정진사세아(與道內義將金翰林垓柳正字宗介鄭進士世雅)」를 보면, 일직현에서 결진(結陣)한 의병의 작전수행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저자는 당시 의병들이다른 부대와 연합작전을 펴지 않고 이웃 고을의 의병이 위급하여도 도와주지 않으며 싸움을 미루고 세월만 허송하고 있음을 지적한 뒤, 머지않아 바닥이 날 군량과 백성에 대한 신뢰의 실추, 그리고이에 따른 이합집산을 말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
잡저의 「노섭유격사충문(勞葉遊擊思忠文)」과 「섭공위덕비(葉公威德碑)」는 예천에서 안동방면으로 진영을 옮겨온 명나라 장수의노고를 치하한 내용으로, 명나라 사람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상이상국완평서(上李相國完平書)」는전란이 끝난 뒤 전란에 대한 기록을 실록청에 제공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밝힌 내용이다. 임진왜란 당시지방 의병의 활동과 실상을 이해하는 데 간접적으로 참고가 된다.
신흘(申仡)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구지(懼之), 호는 성은(城隱). 아버지는신원록(申元祿)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신흘(申仡)[1550~1614]은 아버지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마친 후 묘소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애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가 교수(永嘉敎授)를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형인 신심(申伈)을 도와 창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고 수 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金垓)·유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왜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였다. 1603년(선조 36) 조정의명으로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다. 1608년에는 종질인 신홍도(申弘道)와 함께 회퇴[회재이언적, 퇴계이황] 두분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5)에는 정인홍이 국정을 농락하고 성현을 모함한 무현죄(誣賢罪)로 논핵하기도 하였다. 그후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고요함을 지켰으며, 경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스스로즐기는 삶을 살았다. 아들 삼형제[신적도, 신달도, 신열도]를 잘교육하여 충신, 정치인, 학자로 키웠으며, 이로써 의성 지역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읍파인 광부(光富) 계열이 중추가 되어 전성기를 열었다.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고, 유집으로『성은일고』가 있다.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신적도, 신달도, 신열도삼형제를 비롯하여 신적도의 아들 인재(忍齋) 신채(申埰) 부자를 단구 서원(丹丘書院)에 배향하였다.